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|| [[파일:attachment/정화/gojaking.jpg]]|| || '''[[정화(명나라)|정화]]'''(鄭和) || 정난의 변 승리 이후,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명나라의 정책 역시 급변하게 되었다. 우선 제국의 수도가 [[북경]]으로 옮겨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. 이유야 당연히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. 또한,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. 다만 영락제의 공•과 중에 명백한 과에 속하는 선택이었는데, 최전방에 가까이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고, 제11대 세종 [[가정제]]때, 몽골 튀메드부의 [[알탄 칸]]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수도 북경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.(1550년 '''[[경술의 변]]''') 또한 학자 출신의 측근들을 지니고 있었던 건문제에 비하여, 무인들을 측근으로 지니고 있었으며, 무엇보다 '''본인 자체가 천상 무인이었던'''[* 《북정록》(北征錄)이라는 책에서는 영락제의 이런 언급이 나온다. '''"학자들은 종이에 있는 것만 볼 줄 안다. 이것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."'''] 영락제가 제3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서, 명나라는 '''[[중화제국]]'''의 기풍이었던 주원장의 시대와는 달리 적극적인 '''세계제국'''의 형세를 취하게 되었다. 영락제는 직접 100,0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홍무제나 건문제라면 하지 않았을 막북으로의 원정을 5차에 걸쳐 감행했고, 환관 [[정화]] 휘하의 대함대는 [[유럽]]에서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퍼져나가기 100여 년전, 남중국해와 [[인도양]]을 넘어 [[아프리카]]의 동부 해안까지 다다르게 되었다. 비록 이후부터는 다시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, 비록 단발성의 이벤트에 가깝다고 해도 그 위상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. 그러나 부정적인 면을 보자면, [[환관]]들을 철저하게 억제한 태조 주원장의 기조는 혜종 건문제 주윤문의 시절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, 영락제 주체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게 되면서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. 정변으로 즉위한 탓에 사대부들과 척을 진 영락제는 환관들에게 큰 권한을 주면서 많은 의존을 했고, 이 때문에 명나라는 이후 악랄한 환관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. 또한, 학자들 출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건문제가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대외원정에 매달리지 않았을 점을 고려하면, 영락제 시절보다 명나라는 국가재정에 드는 부담 등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. 정화의 함대는 제5대 선종 [[선덕제]] 시절에도 떠난 적이 있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, 실제로 몽골 원정 등은 엄청난 물자 소비에 비해 실질적인 이득이 적었다. 이 문제는 영락제 본인의 군사적인 능력을 떠난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는데, 타타르의 아룩타이(Aruqtai)나 [[오이라트]]의 [[마흐무드]](Mahmud)같은 적들은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오면 '그냥 도망쳐버렸다.' 근거지를 여러 군데 가지고 있는 유목민족들은 아무리 영락제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그냥 도망쳐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.[* 다만 이러한 공격으로 인하여 초원으로 쫓긴 북원 정권은 매우 빠르게 붕괴되면서 정통성을 가진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직계들이 권력을 잃게 되었고, 각 지역별 부족들이 자립하게 되었다. 이렇게 되고나서야 중국은 초원에 대하여 우위권을 잡았다.(원나라 시기 동안 몽골족들은 춥고 살기 불편한 초원에서 중원으로 내려왔으며, 원나라가 초원으로 내쫓겼음에도 불구하고, 다수의 인원들은 한족에 동화하거나, 중국에 가까운 [[내몽골자치구|장성 인근지역]]에 거주했다. 향후 초원에서 몽골이 다시 부흥한다면 이들이 중국으로 가는 향로와 보급이 될 가능성은 아주 컸고, 실제로 오이라트의 [[에센 타이시]]가 [[토목의 변]]을 일으켰을 때도 이렇게 진행되었다.) 사실상 영종 정통제의 뻘짓만 아니였다면 명나라는 초원에 대한 일정 부분의 통제권(몽골인 다수가 장성과 인접해서 거주)을 유지할 가능성도 있었다.] 결국 영락제는 대군을 이끌고 초원으로 진격했다가, 적을 쫓아버린 후 보급이 떨어지면 귀환하는 일을 반복했다. 이로 인해 단기간의 평화는 얻을 수 있었어도, 최종적인 승리는 요원한 일이었다. 중화제국이 유목민족의 위협을 완전히 뿌리채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된 시기는 영락제의 시기에서도 수백년은 뒤인 청나라 제6대 고종 [[건륭제]]의 시대나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.[* 그래도 피터 퍼듀 같은 사람들은,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공세지향적인 황제가 영락제였고, 이후 명나라의 군주들은 유목세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, 그럴 의지도 없는 양반들이었다고 그럭저럭 영락제의 편을 들어주었다.] 어찌되었건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자리를 맞바꿈으로써, 대명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 역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. 이런 점으로 볼 때, 정난의 변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일대 대사건임은 분명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